군산은 식민지의 사이비 근대가 만든 ‘타자’의 도시였다.
이 책은 ‘군산’을 바라보는 원주민, 탈향 또는 귀향인, 이주민, 여행자, 열 사람의 글을 모았다. 이는 글로컬한 장소성 속에서 개인의 실존과 기억, 공동체의 역사와 감정의 충위를 탐색하려는 시도로 보인다.
하이네의 고향에 대한 비판과 향수, 그리고 하이데거의 우리가 아직 ‘진정으로 거주하지 않는’ 고향에 대한 상념이 이 책 속에 깃들어 있다. 이들에게 군산은 거주한 적 없는듯한 고향이며, 돌아갈 수 없는 기억의 풍경이며, 동시에 다시 짓고자 하는 존재의 터전이다.
황석영 표사
군산은
조용한 항구 도시다. 그러나 그 조용함은 늘 어떤 침묵된 기억을 감춘다.
태어나 평생 그곳을 살아온 사람, 오래 떠났다가 다시 돌아온 사람, 짧은 체류 속에 강렬한 인상을 받은 사람, 여행하는 타자의 시선으로 바라본 사람, 경계인, 토박이, 여행자, 외지인... 이들은 각각의 자리에서 고향을 잃었거나, 찾아가거나, 만들어 간다.
이 도시는 우리가 거주한 적 없는 고향이며, 돌아갈 수 없는 기억의 풍경이며, 동시에 다시 짓고자 하는 존재의 터전이다.
이 책은 물리적인 장소를 소개하는 단순한 지역 에세이가 아니다. 글로벌하며 로컬한 장소성 속에서 개인의 실존과 기억, 정치적 역사와 감정의 층위를 탐색하려는 시도이다. 열 개의 개인적인 서사가 더해져 열 개의 창으로 '군산'이라는 지역을 독자와 함께 바라보게 된다.
<우리는 거주하지 않는다> 서문 일부


본문 일부


녹슨 철문을 열고 들어가니 좁은 골목이 짧게 이어졌고, 여기저기 파인 시멘트 바닥을 지나 창고 같은 건물이 마주 보였다. 깨어진 화분 몇 개가 알루미늄 창틀 옆으로 흩어져 있었고 시멘트 벽에 기대어 있는 제법 깨끗한 자전거가 거의 유일한 삶의 기척이었다. 산만하게 널브러져 있는 살림살이의 잔해들은 그곳이 꽤 오랫동안 버려져 있었던 것처럼 보였다. 몇몇 모퉁이에 붙어 있는 점집의 안내판들은 아직 사람들이 이용하고 있는 곳임을 힘겹게 말해주고 있었다. 골목과 마당의 경계에 있는 모호한 공간이었다.
이와 흡사한 안마당의 풍경이 데자뷔처럼 떠올랐다. 국민학교 입학 전후해서 모든 외가집 식구가 함께 모여 살던 시절이 있었다. 지금의 중앙로 (그때는 그저 신작로라 불렀고 군산에서 유일하게 포장된 도로였다)에 외할머니가 미싱 상회를 조그맣게 운영하고 있었는데, 그 안쪽으로는 널찍한 마당을 가운데 두고 여러 채의 집들이 촘촘히 모여 있었다.
세 도시 이야기, 손진 中


1970-80년대에 서울에 살면서 군산이란 이름을 들어 본 기억은 없다. 아무런 선입견도 없었는데, 고속도로를 내려서 도시로 처음 들어 온 순간부터, 시간과 공간이 뒤얽혀서 모든 요소가 동시에 공존하고 있는 느낌이 들었다. 눈에 익은 70년대 서울의 뒷골목 모습들이 고스란히 보였고, 어렸을 적 시장에서 떡을 팔던 아주머니들이 여전히 시장에 앉아 계셨다.
하지만 인천 공항에서 내려다 보였던 고층 아파트 건물들도 군산에 똑같이 서 있었고 시내 중심은 현재 서울의 상업지역과 다름없어 보였다. 길에서는 부대에서 놀러 나온 미군들의 떠들썩한 영어가 들렸고, 식당에서는 동남아시아 인들이 서투른 한국어로 "맛있게 드세요!"란 말과 함께 반찬을 내왔다. 모든 것이 섞여있었지만 자연스럽고 잘 어울린다.
사랑은 돌고 돈다, 김나령 中


군산의 특징 중의 하나는 바닷바람이다. 비릿한 냄새가 실린 거친 바람이 불어오면 이곳이 항구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항구의 들뜸과 적막함이 바람에 실려 온다. 이른 아침 영화동 거리에 해가 뜰 무렵은 안개가 차오른다. 안개가 어디에서 시작되어서 오는 걸까? ··· 습기는 공기를 무겁게 하고 공기는 대지를 촉촉하게 한다. 안개 속 풍경은 파스텔로 뭉개버린 풍경이다. 상처의 흔적처럼 보이기도 하고 얼룩이 번진 듯이 보이기도 한다. 영화동의 깊은 밤, 느닷없이 안개가 차오르고 텅 빈 거리에 가로등 불빛만 있을 때, 가끔은 어디선가 '꽥' 소리가 규칙적으로 들려서 놀라기도 한다. 큰소리로 '꽥' 하면서 새떼가 대열을 갖추어서 높이 날아간다. 아마도 소리로 보아서 오리가 아니었을까? 그 순간의 풍경은 비현실적인 해리포터의 풍경이 된다. 군산은 이처럼 현실의 풍경과 비현실의 풍경이 나란히 있다.
가을이 가고 겨울이 시작되었다, 윤지원 中


김제나 만경 사람들은 농사를 다 끝낸 겨울철 이국적인 군산에 가는 것을 좋아했다. 만경에서 15km 정도이니 비교적 가까운 거리이지만 겨울철 군산은 딴 세상이었다. 눈이 쌓인 거리는 특히 이국적이었다. 걸어서는 세 시간 정도 걸렸지만 버스로 30분이면 청하 대야를 거쳐 군산 초입에 도착했다. 군산에 가면 그들이 들르는 곳이 있었다. 이성당이라는 빵집에 들러 일본식 모찌를 사오는 일이었다. 이성당 겨울 모찌를 집에 가지고 와서 며칠을 두면 돌처럼 단단해졌다. 돌처럼 굳은 모찌를 연탄불에 구우면 처음 살 때보다 더 부드러워져서 맛도 더 좋아졌다. 겨울날 따뜻한 아랫목에서 먹었던 모찌 맛은 결고 잊혀지지 않는다.
세 줄기의 강과 금만평야, 곽정식 中


맛집을 정리하다가 새로운 소식을 접하게 되었는데 파라디소 페르두또의 송성진 대표가 영화동에 파라디소90, 델깜포를 오픈했나 보다. 내가 군산에 있을 때는 공사 중이었는데, 재즈클럽을 열 예정이라고 해서 크게 기대하고 있었다. 이 글을 쓰는 중에 재즈클럽 머디라는 이름으로 파라디소90과 함께 오픈한 모양이다. 재즈를 좋아해서 늘 전주의 바인홀로 재즈 공연을 보러 다녔던 터라 일부러 시간을 내서라도 재즈클럽 머디에 꼭 들러보고 싶다. 재즈 매니아 입장에서 이곳이 군산의 새로운 명소가 되었으면 좋겠다.
어쩌다 군산, 이형열 中


사꾸라 벚꽃을 도저히 좋아할 수 없었어도, 안도현처럼 시를 쓸 줄 몰랐어도 그 마음이 나와 군산 사이에 거리감을 만들 이유가 된단 말인가. 군산 벚꽃 백리길이, 군산 적산가옥 위로 흐드러진 벚꽃이 내가 군산을 좋아하지 못할 이유가 될 수는 없다. 오히려 세계로 통하는 앞바다를 가졌기에 겪어야 했던 군산의 아픔을 이해하지 못하면서 벚꽃이 아름답기 보다는 불편했다.
늦은 마음, 범은경 中


내가 고교를 졸업할 당시에는 군산대학교가 없었다. 삼수 중에 1978년 입대 후 1981년 5월에 제대한 나는 진로 문제를 고민하고 있었다. 당시 어머니는 도로 확장용 흙을 야적한 집 뒤뜰을 보시고는 노는 땅이라고 생각하셨는지 거기에 깨를 뿌리셨다. 과거 김제에서 깻잎 농사와 토종밀농사를 하셨던 기억이 깨를 심게 하셨는지도 모르겠다. 어머니가 깻잎을 따다가 접고 정리하시는 모습을 보자니 가만히 있기 미안해 어머니를 도우면서 소일했다. 깻잎 세 대야를 가득 채워 북부시장에 가서 팔면 한 대야에 1천 원 정도였던 것 같다. 어머니 삶의 현장을 보며 앞으로 어떻게 살 것인가 고민이 됐다. 지금도 깻잎을 보면 그때 생각이 난다.
저는 군산에 삽니다, 강용면 中


내가 탄 9번 버스는 공단 내부를 샅샅이 돌았다. 기계가 멈춘 듯한 공장들이 부지기수다. 타는 승객은 거의 없지만, 공단 내부를 돌고 도는 의무 주행 버스 안에서 빈 공장들을 바라보자니 문득 제주도에 와 있는 예멘 난민들이 생각났다. 수도나 전기 같은 편의시설은 있을 테니 그들이 여기서 예멘식 생활문화로 자립모델을 구축할 수 있다면 공간도 재생되고 좋지 않을까 싶었다. 터무니없는 생각이려나.
보름이 채 되지 않아 세 번째로 군산을 찾았다. 군산 생활자들의 삶의 모습을 모아보려고 숙소에서도, 버스정류장에서도 처음 만난 사람들과 이야기했다. 짐을 풀고 여관주인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밖으로 나갔다. 지도로 찜했던 중앙로 주변은 상권이 무너지는 모양새다. 점포는 비었으나 임대나 매매 표시는 없다. 근처의 빈 점포들을 두리번거리며 동네 분위기를 익혔다.
군산에 산다, 정옥순 中


그러나 이곳은 내가 어릴 때는 바다였다. 농발게와 ‘아사리’를 잡는 갯벌이 밀물 썰물 때에 따라 펼쳐지는 놀이터이기도 했고 때로 밥을 대신하는 해산물을 얻는 곳이기도 했다. 썰물 때엔 바닷물이 흐르는 곳까지 가서 뻘을 소쿠리에 담아 흔들면 아사리가 흰빛을 내며 빛났고 가져온 양동이에 옮겨 담았다. 한참 후에 이곳은 합판공장이 수입한 원목들이 동아줄에 꿰어져 등을 부딪치며 출렁거리는 원목저장소이기도 했다. 바닷물에 출렁대는 꿰어진 원목 위에서 술래잡기도 했다.
벤치 앞을 지나가는 사람이 가볍게 목례를 한다. 나도 미소를 지으며 ‘더 건강해 보입니다’라고 인사를 건넨다. 건너편 금란도를 오가는 트럭 몇 대를 본다. 금란도는 2022년에 서천군과 협약하면서 이른바 ‘개발’이 개시되어 2030년을 목표로 조성되고 있다. 바다 위에 새로운 도시가 건설되면 그곳에 해양레저 및 생태 공간이 조성될 것이라고 한다.
고향 가는 길, 강형철 中


보면 볼수록 들으면 들을수록 군산은 '바람의 도시'이고 '풀의 도시'였다. 어찌 그리 군산에는 군산의 고유성 혹은 특이성을 휩쓸어 버리려는 바람이 끊이질 않은지, 그것도 신기하지만 그 거친 바람 속에서 그 바람을 이겨내는 '풀'의 모험 역시 그리 한결같고 다채로운지. 해서 군산의 장소 곳곳엔 채만식이 '잘난 사람들'이라고 표현한 '강한 자, 부유한 자, 뻔뻔한 자, 그리고 남성'들만을 배려한 근대의 폭력적 구조를 배태한 상흔이 임리하지만, 동시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근대 특유의 구조적 폭력을 균열시키고 단절해내기 위한 저항과 쟁투의 흔적 또한 선명한 것이 사실이다. 이렇게 한결같이 거센 바람이 불었음에도 한결같이 꺾이지 않는 마음과 몸짓으로 먼저 일어나는 도시가 바로 군산이며, 그것이야말로 군산의 특이성이라 할 만하다.
바람보다 더 빨리 눕고 먼저 웃는 풀-이기, 류보선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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